#2615

도입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떠나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화면 하나를 붙잡고 씨름하던 그 시절의 감각이 어딘가 남아있는지 사용자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직무가 바뀌었다고 관심사까지 통째로 바뀌는 건 아니었던 셈이다. IT업계에서 일한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 역시 매일 무언가의 사용자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용자라는 존재 자체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온다. 처음엔 그냥 궁금증 정도였는데, UX에 관심이 생기면서 오히려 일이 더 재미있어지는 걸 느꼈다. 버튼 하나, 문구 하나를 볼 때도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따라가게 된다.
사용자를 15개로 쪼갠다는 것
디자이너로 일할 때도 머릿속에 '사용자'라는 말은 늘 있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사실 흐릿했다. 회의에서 "사용자 입장에서는~"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썼으면서도, 그 사용자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화면을 보고 있는지는 뭉뚱그려 넘긴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은 그 뭉뚱그림을 15가지 페르소나로 잘게 쪼개 놓는다. 읽는 사용자, 헤매는 사용자, 기다리는 사용자처럼 상황별로 이름을 붙여놓으니 그동안 뭉쳐서 생각했던 '사용자'가 갑자기 여러 얼굴을 가진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화면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를 텐데, 그걸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 왔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만들었던 화면들을 떠올려보면, 그때는 '어떤 사용자든 다 이해할 수 있게'라는 목표 하나로 밀어붙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하나의 목표 안에 실제로는 서로 다른 여러 사용자가 뭉쳐 있었을 텐데, 그 차이를 세심하게 들여다볼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천천히 읽게 되는 책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빨리 읽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페르소나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례가 아니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만들었던 화면이나 최근에 써봤던 서비스를 하나씩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보다는 방금 읽은 내용을 내 경험에 대입해 보는 시간이 자꾸 길어졌다. 어떤 장은 두세 페이지를 읽고 나서 책을 덮어두고 한참을 딴생각을 하다가 다시 편 적도 있다. 보통 책을 읽을 때는 진도가 밀리면 좀 불안해지는 편인데, 이 책은 이상하게 그런 불안함이 안 들었다. 확실히 UX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페이스가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질 것 같다. 반대로 UX라는 단어 자체가 낯선 사람이라면 이 속도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그 느린 속도 덕분에 오히려 책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15가지 페르소나 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첫 장에 나오는 '읽는 사용자'다. 타이포그래피에 원래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 장이 유독 재미있게 읽혔다. 화면 속 텍스트를 사용자가 어떻게 눈으로 훑고 읽어내는지를 다루는데, 그동안 디자인 요소 정도로만 여겼던 타이포가 사실은 사용자의 읽기 경험 자체를 좌우하는 UX 요소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폰트나 자간을 그냥 미감의 문제로만 봐왔던 나로서는, 같은 텍스트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사용자가 읽는 속도와 이해도가 달라진다는 설명이 꽤 인상적이었다. 디자이너 시절엔 폰트를 고를 때 예쁜지 아닌지를 먼저 따졌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얕은 기준이었는지 이 장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한 셈이다. 같은 문장도 자간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눈이 머무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걸 알고 나니, 앞으로 화면 속 글자를 보는 눈이 예전과는 좀 달라질 것 같다.
다만 지금은 현업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최신 실무 기준을 들이대며 완성도를 평가하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관심을 이어온 사용자 입장에서 읽은 소감에 가깝다는 점은 미리 밝혀두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은 완독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옆에 두고 계속 참고하게 되는 책에 더 가깝다. 어떤 페르소나는 지금 하는 일과 바로 연결되고, 어떤 페르소나는 당장은 감이 잘 안 오는 것도 있었는데, 그 부분들은 나중에 비슷한 상황을 실제로 마주쳤을 때 다시 펼쳐봐야 이해가 될 듯하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일하면서 하나씩 시험해봐야 할 것 같다.
마무리
이 책은 웹이나 앱처럼 사용자를 직접 상대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직종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 같다. 기획자든 디자이너든 개발자든, 화면 너머의 사용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잘 맞을 듯하다. 예전에 디자이너였던 사람이 지금은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이런 책을 집어 들고 반가워하는 걸 보면, 사용자에 대한 관심이라는 게 직함이 바뀌어도 잘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은 평소에 쓰던 앱이나 사이트를 볼 때마다 '이건 어떤 페르소나를 향한 화면일까' 하고 한 번씩 되짚어보게 됐는데, 이런 습관이 생긴 것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뽑은 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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