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6

『블랙 쉽』은 결국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손에 쥐여주는 책이다. 도서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다가 제목에 끌려 우연히 집어 들었다. 완독하고 나서 남은 인상은 뚜렷한데, 무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가치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검은 양'이라 부르고, 그 검은 양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법을 계속 캐묻는 책이라는 점이다. 거창한 각오보다 오늘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꾸 되묻는 태도가, 읽는 내내 편하지만은 않았다.
검은 양이라는 은유, 나답다는 것의 의미
『블랙 쉽』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양(black sheep)'은 원래 무리에서 튀는 존재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표현에 가깝다. 그런데 저자는 이 단어를 뒤집어서, 남들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핵심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시 정의한다. 문제는 그 핵심 가치라는 게 말처럼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신의 욕구를 존중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며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당연한 말 같은데, 막상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 물어보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회사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 부모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SNS에서 다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 사이에서 정작 내 것을 걸러내는 훈련은 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깨달았다.
일상에서 적당히 중요한 것들로부터 핵심 가치를 분리하지 못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실패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표현이 꽤 단호해서 처음 읽었을 때는 살짝 과장 아닌가 싶었는데, 곱씹어보니 그럴듯한 데가 있다. 적당히 중요한 일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진짜 중요한 것에 쓸 시간과 에너지가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시간관리 책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지만 '핵심 가치'라는 단어로 다시 들으니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나만의 참된 핵심 가치를 발견하려면, 먼저 스스로를 잘 들여다봐야 하는데, 왜 그렇게 힘들까? 바로 책임지기도 싫지만, 취약한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뜨끔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힘든 이유를 게으름이나 시간 부족이 아니라 '책임지기 싫음'과 '취약함을 마주하기 싫음'으로 짚어내는데,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이 잘 안 됐다. 핵심 가치를 안다는 건 결국 그 가치대로 살지 못했을 때의 자기 실망까지 떠안겠다는 뜻이라, 모르는 채로 사는 쪽이 마음은 편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매일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이유
『블랙 쉽』이 다른 자기 계발서와 갈라지는 지점은 '핵심 가치를 찾았다'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찾은 가치를 날마다 손에 잡히는 행동으로 옮기라고 집요하게 요구한다.
말 그대로 날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달력을 꺼내어 일정을 확인하고 언제 어디에서 검은 양 가치관을 드러낼지 생각해 보자
추상적인 다짐이 아니라 달력을 꺼내라는 구체적인 지시라서 오히려 실행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계획이라고 하면 거창한 목표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이 책은 '오늘 오후 3시에 어디서 누구에게 이 가치를 드러낼 것인가' 수준까지 내려가라고 말하는 셈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검은 양은 미래에 살지 않는다. 우리의 핵심 가치는 인생을 사는 동안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핵심 가치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인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나중에 자리를 잡으면'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꽤 따갑게 다가올 듯하다. 핵심 가치는 미리 완성해 두고 나중에 꺼내 쓰는 물건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관점 전환이, 이 책에서 가장 실용적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의사결정사슬, 좋은 결정을 내리는 세 가지 기준
『블랙 쉽』 후반부에는 핵심 가치를 실제 의사결정에 연결하는 도구가 나오는데, 이게 개인적으로는 가장 써먹을 만하다고 느낀 부분이다.
좋은 결정을 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핵심 가치(타협할 수 없는 것)를 파악하라. / 모든 사실을 고려하라. / 순간의 감정을 존중하라.
나는 이것을 '의사결정사슬 decision supply chain'이라고 부른다. 과정은 아주 간단하다. 좋은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는 세 가지 기본 단계가 있다. 각 단계를 모두 거치고 나면, 결과와 상관없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의사결정사슬(decision supply chain)이라는 이름부터가 트레이더나 경영 컨설턴트가 즐겨 쓸 법한 용어라 낯설게 느껴졌는데, 내용을 뜯어보면 핵심 가치·사실·감정이라는 세 축을 순서대로 점검하라는 비교적 단순한 도구다. 그동안 나는 결정을 내릴 때 사실관계만 저울질하거나 반대로 순간 감정에만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핵심 가치라는 기준 하나를 앞에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흔들림이 줄어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올바른 결정'이라는 말도 눈에 띄었는데,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거쳤는지로 좋은 결정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태도가 은근히 위안이 됐다.
아쉬운 점과 이런 사람에게 맞을 듯
아쉬운 점을 짚자면 미국식 동기부여 강연 특유의 어조가 책 전반에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짧은 문장으로 몰아붙이듯 다짐을 요구하는 대목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중반 이후 조금 지칠 수도 있겠다. 저자 개인의 경험담과 강연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사례들이 미국 사회와 직장 문화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나라 독자 입장에서는 그대로 대입하기보다 한 다리 건너 참고하는 정도로 읽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남들이 정해준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느낌이 들어 답답했던 사람, 핵심 가치라는 말은 익숙한데 정작 자기 것을 또렷한 문장으로 써본 적은 없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이미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고 실천 루틴까지 갖춘 사람에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내용이 적을 수 있겠다. 책장을 덮고 나서 달력을 펴고 다음 주 일정에 내 핵심 가치를 어디에 끼워 넣을지 고민하게 됐다면, 책값은 이미 뽑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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